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 (문단 편집) == 히틀러의 라이벌 == * [[이오시프 스탈린]] - '''어제는 동지, 오늘은 적.''' 아돌프 히틀러는 집권 후 [[소련]]과 우호적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방침을 뒤엎고 소련을 위협하면서 디스했으나,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 영-불과의 대결이 임박해지자 잠시 [[독소 불가침조약|적과의 동침]]에 이르러 소련과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이렇게 손잡은 동안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눠먹고, 독일은 서유럽에서 신나게 프랑스-영국과 싸우는 동안 소련은 보이지 않게 동유럽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챙겼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서유럽에 그치지 않아서 드넓은 소련땅까지 꿀꺽하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을 침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세기의 독재자로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 건 두 독재자는 서로를 존경했다. 스탈린은 1934년 나치당 좌파와 돌격대 국방군 내 반대세력을 숙청한 '장검의 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도 독소 불가침 조약 전후로 '스탈린은 볼셰비즘에서 국제 유태적인 요소를 많이 청산했다'라며 덕담을 했다. 히틀러는 전쟁 중에도 소련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의 대리인으로 스탈린을 세워야 한다고 발언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1944년 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암살당할 뻔했다가]] 구사일생한 이후엔 스탈린처럼 군부를 가차없이 숙청했어야 되었다고 후회했다. 이런 여러가지 면모를 봤을 때 두 독재자는 쌍둥이처럼 유사성이 많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참조. 다만 둘이 서로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 [[윈스턴 처칠]] - 아돌프 히틀러 자신이 인정한 최대의 라이벌.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는 적이었으며, 처칠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아돌프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 것이다. 당연히 히틀러는 처칠을 부정적으로 여겼기에 처칠을 알콜 중독 "저질" 선동가이며 전쟁광이자 국제 유대 자본에 굴종한 금권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히틀러의 악감정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유대인 음모론스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실제로 처칠은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했고 말솜씨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거기다 전시 수상이란 것도 결사 항전을 맹세한 점 하나 때문에 붙은 별명이고, 그의 전략적 안목은 없는 것보다도 못한 수준이라서 일선 장군들이 처칠의 계획에 맹반대하며 독자적 작전을 수립하지 않았으면 영국이 망했을 거라는 게 중론일 정도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북아프리카 전역. 처칠은 독일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북아프리카의 롬멜을 쫓아내는데 지나치게 집착했고 공격을 강요했다. 롬멜의 주특기는 방어든 공격이든 준비가 덜 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기동이었고 당연히 상부의 압박으로 이루어진 영국군의 공세를 분쇄해버리며 이집트 국경까지 도달했다. 그나마 오킨렉이 부임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롬멜의 소모를 유도해 승기를 잡고 있었는데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잘라버렸다. 심지어 오킨렉은 처칠에게 소모전 전략의 중요성을 정말 친절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그리고 임명된 사령관이 바로 몽고메리였다. 이 사람은 오킨렉처럼 친절히 처칠을 설득하는 양반이 아니라 대거리하는 양반이었고 그의 처칠말 개무시하기 덕에 영국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파하고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다. 또한 아서 해리스의 드레스덴 폭격을 비롯한 독일 민간인 무차별 폭격을 승인한 양반도 바로 이 양반이었다. 정작 드레스덴 폭격이후 비난이 쏟아지자 아서 해리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고 승전 기념식 때 공훈부대 명단에서 폭격기부대들을 제외시켜버렸다. 정작 아서 해리스와 처칠의 무차별 폭격 작전으로 12만 명의 폭격기 승무원 중 5만명이 전사 했던걸 고려하면 입만 산 저질 선동가라고 까일 만 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만 히틀러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신경쓰지도 못했고, 그를 전쟁에 끌어들인 건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지만, 그가 [[뉴 딜]] 정책으로 복구시킨 [[미국]]이 아니었으면 [[윈스턴 처칠|처칠]]은 마음 놓고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해에 집권해 같은 해에 재임 중 눈을 감았다. 여담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루스벨트가 소아마비가 아니라 매독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루스벨트가 죽은 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이 소련과의 대치를 우선시하여 전쟁을 멈출 거라고 기대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물론 그의 예상이 맞긴 했지만 트루먼이나 스탈린이나 그 전에 히틀러부터 때려잡고 그 다음 서로 적대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샤를 드골]] - 아돌프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눈엣가시로 알려졌으며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고 드골이 런던으로 망명하면서 나치를 프랑스에서 몰아내자며 프랑스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자 아돌프 히틀러의 라이벌이자 적이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프랑스인들에게 고하는 성명에서 우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어 자유를 되찾자는 호소를 하였다. 사실상 아돌프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적대지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라지만 정작 수장인 드골은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만 하겠다. 다만 이는 드 골이 망명 당시 고작 소장에 불과했으므로 당시엔 히틀러가 잡으려고 생각할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 [[하얀 장미|백장미단]] - [[나치 독일]]에 유일하게 항거했던 독일의 대학생 단체. [[한스, 죠피 숄 남매]]를 중심으로 1942년에 결성되었다.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나치의 패망을 선언하는 전단지를 뿌리면서 극악무도한 독재자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그의 수하들]]에게 대항했지만, 1943년 체포되었다. 한스 숄, 조피 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첫 재판 이후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두 번째 재판 이후 사형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